불안을 위무하는 이미지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애초에 이미지는 불멸에 대한 희구와 욕망을 담고 있었다. 불멸에 대한 감정은 일회적 삶을 사는 인간이 겪는 시간에 대한 회환과 운명에 대한 비애,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공포와 비탄들을 뛰어넘어 보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토대에 대한 기대 위에서 작동한다. 이미지나 문자. 갖가지 도상들의 역할은 애초에 주술이고 부적에 해당하는 존재로서의 위력을 갖춘 것들이다. 그 후에 소통의 체계로서 기호의 역할로 자리매김되었지만, 역할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이미지나 문자는 이전의 신화적인, 신비한 역할을 종종 실현해내고 있다. 오늘날의 다양한 상징이나 문장紋章 역시 여전히 인간적인 소망과 희구가 깃든 여러 의미망으로 촘촘히 직조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은 이미지에 깃든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서사를 지워내고 이미지를 이미지 자체로 환원하거나 그것의 물적 조건을 탐색하는 쪽으로 기운 무브먼트였다. 미술에서 신화와 종교, 문학적 내용을 지우고 이미지를 이미지 자체로만 여기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지에서 의미를, 서사를 완전히 소거시킬 수는 없다. 동양화 역시 전통사회내에서는 지배이념인 유교 사상을 도상화시킨 것이자 도교적인 차원의 상징체계 내지 불교와 무속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차원에서 기능했다. 산수화와 사군자, 불화와 민화 등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전통사회에서 행했던 동양화의 기능은 탈각되고 순수한 이미지로, 전적으로 시각적인 회화로 자족하게 되었다. 산수화는 풍경화로 사군자는 정물화로 민화는 현대사회에서 대중매체와 광고 등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미지가 지닌 모종의 영성적인 힘, 영향력에 주목하는 경우도 지속되고 있다. 그것이 현대판 주술적인 회화, 부적이나 무속화 혹은 무속에서 사용되는 이미지 장치를 차용하고 변형하는 일련의 작업에 해당한다.
고은주의 작업은 평면 작업과 입체 작업을 병행한다. 평면작업은 갖가지 문양과 도상들이 복합적으로 직조되어 펼쳐진다. 좌우대칭의 구도 아래 유럽의 문장에 여러 기물이 스며들고 그 주변으로 동물과 나비, 꽃, 보석 등이 박혀있다. 이미 그 도상 하나하나가 화려한 색채와 화려한 형상, 유기적인 곡선과 풍부한 볼거리를 거느리고 등장하기에 그림으로 그려지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 동시에 그 도상은 현대판 주술적 이미지이자 부적에 해당한다. 작가는 스스로 여러 길상의 의미를 지닌 도상들을 뒤섞어서 다양한 의미를 증폭시키는 부적을 색다른 문장紋章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도 맑음부, 오늘도 무사부, 재물부, 애정부, 행운부, 창성부, 애정부귀부, 삼재소멸부, 창성부, 입시성취부 등의 제목을 단 그림은 갖가지 소망과 염원을 실현시켜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면서 현대인들이 지닌 앞날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잠재적으로 진정시켜주거나 위안을 주는 매개로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새삼 전통사회에서 기능했던 부적의 의미와 용도를 새롭게 환생시켜 자신이 사는 시대의 불안을 위무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 그림은 그러한 불안을 공유하는 타자에게 건네는 선물과도 같은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차원에서 환하게 빛난다.
최근작에는 문자가 직접적으로 기술하면서 동시대의 소망을 지시하는가 하면 금박, 은박에 의해 입혀져서 화려함이 극대화되기도 한다. 그림은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계산된 구성에 과잉으로 그려지고 있는 편이다. 갖가지 색채와 형상들을 내포하고 있는 각각의 도상들은 기존의 문장과 매우 유사하면서도 그 내부에 다양한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진행된다. 아마도 이 문장의 각 요소들은 그림의 제목에 따른 모종의 역할, 의미를 부여받은 이미지들일 것이다. 그것들은 부귀와 영화, 애정과 벽사 등의 인간적인 소망을 부르는 이미지를 한자리에 불러들여 집약시킨 결합체로서 스펙터클한 판타지를 구성한다. 이질적인 개체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원형의 틀 안에서 좌우대칭으로 물려있는 기묘한 상황은 흥미로우면서도 생경함이 감도는 부적의 분위기를 증폭한다.
정교하고 집약적인 채색화로 그려낸 일련의 부적-문장그림이 오랜 수공의 솜씨로 빚어진다면 우리네 전통 무속인 앉은 굿에서 사용하던 설위설경의 종이 바수기(종이오리기)를 차용한 작업은 한지를 레이저 커팅해서 정교한 문양을 추출해내는 일련의 작업이다. 이 역시 좌우대칭의 방사형 구성 아래 정교하게 다듬어진 작업이다. 족자 형태로 길게 드리워진 한지는 커팅이 된, 부재한 빈 틈으로 인해 모종의 추상적인, 기하학적인 갖가지 문양을 처연하게 드리우면서 허공에 직립해있다. 다소 어두운 전시공간에 걸린 이 화면은 빛이 투과하면서 생겨난 그림자를 벽면과 바닥에 적나라하게 드리우고 있다. 화면과 그림자가 일대일로 대응한다. 실체와 허상이 공존한다. 전시장 천장 벽에 내려 걸린 화면은 그것 자체로 오려진 부분들로 인해 남겨진 부분과의 상관관계로 인해 좌우대칭의 화려한 문양을 당당하게 펼쳐내면서 허공에 매달려 잔잔하게 진동한다. 그것은 전시장 내부를 채우는 공기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얇은 피부를 섬세하게 흔든다. 동시에 보는 이의 시선을 뚫린 구멍 사이로, 빈 틈으로 통과시켜 벽으로, 허공으로 산개시킨다. 아울러 그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시선을 안착시킨다. 실재를 피하고 허상에 가닿는 시선이고 종내 무에 도달하는 눈들의 허무다.
<서천꽃밭>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 열락의 지대, 천당이나 유토피아, 화엄의 세상이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꽃들이 피어 있는 이상적이고 신화적인 생명공간을 뜻한다. 아울러 작가는 무속에서 사용되는 지화를 재해석하여 종이 입체물을 전시장 바닥에 설치하기도 한다. 상상으로 만든 이 종이 꽃들은 무속에서 사용되는 부귀영화와 장수를 축원하는 동시에 액막이 용으로 사용되는 꽃을 차용한 것으로 기둥의 형태를 지닌 축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방사되는 꼴로 이루어졌다. 좌대 없이 스스로 직립해 있는 종이꽃은 길게 드리워진 <서천 꽃밭> 작업 앞에 흩어져 도열해 있는 식으로 설치화된다. 여기서 하늘로 상승하는 기운을 은유하는 형태는 간절한 소망과 희구를 보여주는 상징물에 해당한다. 이것 역시 컴퓨터 작업을 거친 다음 로얄보드 2합지를 컷팅 플로터기를 이용하여 컷팅해서 제작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신화와 무속에서 차용한 부적 내지 종이 오리기, 종이꽃 작업은 오랜 시간과 공력을 요구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러한 집중을 요하는 시간과 과정을 통해 작가 자신의 마음에 평정과 위안을 주는 행위이자 앞날의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기복의 차원에서 기능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이 보다 확장되어 타인의 삶과 마음으로 전이되기를 희구하는 쪽으로 번져나가기를 희망하는 그림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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